[Review] G. Kubler, The Shape of Time (Lee, K. 2025. About the Shape of Time)

이강민(Lee, Kangmin). (202506). “시간의 형상에 대하여” , <건축(대한건축학회지)> 69(6), 62-63.

양식사는 이해하기 쉽다. 현존하는 예술품을 일정한 덩어리로 묶어 ‘양식’이라 부르고, 나이를 부여하여 그것이 유년기인지, 청년기인지, 노년기인지를 알려준다. 인생의 생로병사와 같은 양식의 생애주기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성공과 그 이후 서서히 늙어가는 양식의 모습은 한 천재 예술가의 삶을 보는 듯하여 더욱 깊은 인상을 준다.

도상해석학은 신비롭다. 도상해석학은 형태 뒤에 숨은 의미와 주제를 찾아낸다. 고딕에서 스콜라 철학을 읽어내고, 르네상스에서 인본주의를 일깨운다. 각 상징의 의미를 알아가며 우리는 예술 작품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느끼게 된다. 예술품이 지닌 비밀스러운 진리를 깨달을 때, 인류가 도달한 고상한 정신과 사유 체계에 탄복하게 된다.

따라서 양식사와 도상해석학은 모두 아름답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서술 방식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듯하다. 예술사를 통해 습득한 지식은 건축을 직접 방문하고 체험할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형태를 넘어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거대한 시대정신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는 신화나 위인전을 읽듯, 성숙한 인간성을 함양하는 경험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술 작품이 일상적 기물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고, 창작의 배경이 되는 시대정신이 명확히 드러나야 하며, 예술가의 생애와 개성이 충분히 재구성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문화권에서 예술사는 성립할 수 있는가?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중세와 근대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도 양식사와 도상해석학이 유효한가?

조지 쿠블러는 1940년, 16세기 멕시코 건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평생 예일대학교에서 중남미 건축과 예술을 연구한 학자다. 그는 50세가 되던 1962년에『시간의 형상』을 출간했다. 짐작컨대, 예술품의 구별법도, 예술가의 계보도, 체계화된 고등종교의 존재도 확인하기 힘든 아메리카의 상황에서 기존 미술사 방법론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특정한 조건이 우연히 일치할 때만 생겨나는 인식 현상으로서의 ‘양식’은 마치 ‘무지개’와 같은 것으로서, 그의 연구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현상이었다.

이에 쿠블러는 먼저 연구의 대상을 예술품과 도구로 구별하지 않고 ‘사물’로 확장했다. 창작의 동기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술품인지 여부가 확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사물에서 ‘형식’과 ‘의미’를 분리했다. 의미는 알기 어렵고 바뀔 수도 있지만, 형식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우선 분석해야 할 것은 형식이었다. 나아가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도 형식 발달의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으므로, 형식은 창작자의 개성보다 선행하는 예술사의 체계를 구성한다고 확신했다.

쿠블러가 제안한 예술사 방법론, 즉 ‘형식의 순서배열’은 기존 양식사 또는 도상해석학과 차별된다. 그는 예술품이 생애주기를 가진다는 양식사의 생물학적 비유를 제거했다. 오히려, 별빛이 보내는 신호를 보고 행성의 나이를 추정하는 천문학을 비유로 선택했다. 나아가 사물의 신호에는 ‘자가신호’와 ‘종속신호’가 있는데, 형식만이 자가신호이며 의미는 종속신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쿠블러에 따르면, 자가신호를 포착하여 형식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사 서술이다.

이렇게 배열된 사물들은 하나의 ‘시리즈’를 이룬다. 이를 추동하는 요인은 당면한 ‘문제’이며, 시리즈는 그 ‘해법’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건물에 자연광을 효과적으로 들이는 다양한 해법들이 하나의 시리즈를 이룰 수 있다. 이 시리즈는 성장이나 노화를 겪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품’과 ‘복제품’이라는 구별만 존재한다. 굳이 생물학적 비유를 빌리자면, 진품은 ‘유전자형’이고, 복제품은 그 ‘표현형’이다.

진품은 시리즈의 시조가 된다. 진품은 무수한 복제품을 양산한다. 그러나 진품은 무작위적인 노트나 스케치처럼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후 등장하는 복제품과 외형상 크게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품과 복제품을 가리는 일은 연구자의 역량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더구나 이 작업은 희미해진 원본과 빈약한 복사본만을 가지고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시리즈의 지속 기간은 각각 다르다. 빠른 사건과 느린 사건이 모두 존재하며, 미완성된 시리즈도 적지 않다. 쿠블러의 관찰에 따르면, 보통 예술가들은 15년을 한 주기로 하여 인생의 주요 단계를 거치고, 전체 활동 기간은 약 60년에 이른다. 또 사건들은 약 120년 동안 60년 주기의 두 단계를 거쳐 퍼져나가며, 한 시대는 대체로 3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5년의 배수로 설정되는 시기 구분은 다소 자의적일 수 있지만, 그 나름의 통찰을 제공한다.

요컨대, 이 책은 양식사의 생물학적 서사를 부정하고, 도상해석학이 강조해온 의미론을 넘어, 시간 속에서 형식들이 문제 해결을 반복하며 변이하는 형상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쿠블러의 개념을 빌리자면, 그는 예술사 연구 방법론의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쿠블러가 주장했듯, 예술품의 성공 여부가 형식 배열의 진입 순서에 달려 있다면, 연구 방법론의 성공 또한 그 진입 순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쓰여진 1960년대는 사상사에서 구조주의가 전성기를 누리고, 후기구조주의가 서서히 대두하던 시기였다. 쿠블러의 저작은 형식의 질서와 체계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에 가까우나, 형식과 의미의 관계를 해체했다는 점에서는 후기구조주의의 입장과도 통한다. 따라서 동시대 미셸 푸코가 밝혔듯이, 자기 시대의 지식과 인식의 무의식적 조건, 즉 ‘에피스테메’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책이 출판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이후 건축사 연구의 다양한 시도들이 이 책의 문제의식과 시리즈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에 읽은 도라 P. 크라우치의『건축사』(윤장섭 번역, 동일출판사, 1990)에서 받은 감동이 떠오른다. 이책은 문제와 해법이라는 틀을 통해 서양건축사를 재구성한 책이었다. 또한 같은 시기, 한국건축 사학자들은 식민지 시대에 성립한 기존 목구조 양식론을 비판하면서 ‘법식’이나 ‘형식’의 새로운 순서 배열을 논하는 중이었다. 이후 쿠블러의 관점과 유사한 연구들은 더욱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시간의 형상』은 예술사 연구 방법론의 새로운 시리즈를 여는, 말 그대로 ‘진품’ 같은 책이다. 임종현, 최남섭 두 분이 이 뛰어난 저작을 한국어로 소개해 주었고, 정확하고 섬세한 번역 덕분에 난해한 개념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앞으로 형식의 순서 배열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건축사 서술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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